서문 - 앞서 가는 것의 목소리
내 책장에는 꼭 두 권 이상 꽂혀 있는 책들이 있다. 어떤 것은 여행지나 출장지에서 충동적으로 재구매를 했었고, 또 다른 것은 생일이나 특별한 날 실수 아닌 실수로 받게 된 선물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감사한 기회로 출간할 수 있었던 나의 책과 스스로 생을 놓아버린 동생의 유품이다. 그가 떠나고 주변의 닦달에 못 이겨 정리한 유품들이 많다. 망인의 유품들이 이승에 그대로 놓여있으면 혼백이 떠나지 못하고 떠돈다는 말을 남들에게 골백번은 들었다. 혼백이 이승을 떠돈다거나 머무른 곳으로 돌아온다는 말은 믿지 않았다. 그 말이 이곳에 남은 사람들을 위해 태어난 말임을 알았고 그저 충실히 따랐다. 옷가지는 태우고, 그가 소유했던 몇 안되는 사물들은 대부분을 버렸다.
나는 유독 그의 일기장과 책들만은 버릴 수 없었다. 어느 날은 책장에 있는 모든 책을 꺼내서 털어본 적도 있다. 한 장 편지라도, 혹은 죽은 그의 혼백이라도 한 조각 떨어질까 싶어서. 잘 있어. 이승에 남기고 간 말이 그게 다였으니 뭐라도 숨겨놓고 가지 않았을까. 내가 상상하던 극적인 일은 없었다. 열심히 책을 흔들어보니 뭐가 툭 떨어지긴 하더라. 가령, 이런 기억.
나는 책을 읽고 있었고, 동생은 손톱을 자르고 있었다. 바짝 자른 손톱을 좋아하는 나와는 다르게 그는 긴 손톱을 좋아했다. 미루고 미루다가 자르는 주기가 한 달에 한번. 그러니까 일 년에 대략 열두 번쯤. 톡-톡. 읽고 있는 문장에 눈을 떼지 않고 손톱을 자르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박자가 일정해서 듣기에 좋았다. 나는 그걸 달에게 먹이를 주는 일이라고 했다.
켈트족은 시월이 1년의 끝이었다더라. 그 끝이 핼러윈이었고.
손가락이 열개 밖에 없어서 그런가.
손가락?
왜 그렇잖아. 하나, 둘, 셋. 어렸을 때 손가락 하나씩 접어가면서 숫자를 세잖아. 그러다 보니까 달을 열 번 밖에 못 센 거지.
그럼 네가 한 달에 한 번씩 손톱 깎는 건 열두 번을 세려고 그러는 거고? 달밥 주는 거네.
그럴지도.
나는 동생에게 옛사람들이 그리 멍청하지는 않았을 거라며 핀잔을 주고는 마저 책을 읽었다. 손톱 자르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 톡-톡. 달이 손톱을 받아먹으며 배를 불렸다. 동생이 손톱을 자르던 날에 읽고 있던 책은 내게 두 번째 책이었다. 왜 집에 있는 책을 또 사 오느냐고 물으면 그건 내 것이 아니라고 했다. 나는 늘 그게 좋았다. 한집에 살면서 둘인 게 좋았고, 한 책장에 두 권의 책이 있는 게 좋았다. 내가 아끼는 문장이 그가 싫어하는 문장이라 좋았고, 또 내 것이지만 내 것이 아닌 게 좋았다. 더부살이. 그와 나는 마치 서로에게 얹혀 사는 듯 지냈다. 그가 떠나고 한동안 달을 보며 한바탕 눈물을 쏟는 일이 잦았다. 잔뜩 굶주려서 여윈 달날을 보면 손톱을 잘라주고 싶었는데 내 손톱은 너무 뭉뚱 하고 짧아서 내줄 것이 없었다. 나는 손톱도 없이 가난하다.
동생의 유골함을 들고 친구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던 날, 나는 그가 목을 맸던 자리에 얇은 이불 하나를 덮고 잠을 청했다. 굳이 그 자리에서 자야겠냐며 친구들은 핀잔을 줬고, 가위에 눌리는 거 아니냐고 농담을 하며 떠났다. 나는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고 자꾸만 어떤 목소리를 기억하려고 애썼다. 망각의 저편으로 가장 앞서가는 형상이 목소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사람은 늘 두 가지의 목소리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해왔다. 하나는 타인에게 들려줄 수 있는. 성대에서 울려 나오는 실재의 목소리. 다른 하나는 자신과의 대화를 하고 있을 때 내부에서 울리는 목소리. 그런 내게 또 다른 목소리 하나가 더 생겼다. 나는 그 목소리를 유령들의 목소리라고 여겼다.
앞으로 이어갈 문장들은 동생이 떠난 뒤 3년 간 들으려고 애썼던 목소리들의 기록이다. 그 시간 속에 기록했던 목소리들과 이후에 기록될 목소리들을 고스란히 옮겨놓고 싶었다. 그 기록 속의 시간은 더디고, 소란하고, 혼란했다. 회복하는 시간이었다. 자주 지쳤고, 쉽게 스러졌다. 외출과 만남을 자제했고 오롯이 회복에 전념했다. 그렇게 바깥의 시간보다 안의 시간이 길었다.
더부살이. 겨우살이. 하루살이. 같은 말에는 기생과 연명의 끈질김이 깃들어있다. 나는 안의 시간 동안 죽음보다 삶을 더 끈질기게 갈망했던 것 같다. 어쩌면 글을 쓰고 있는 이 방. 그러니까 동생이 목을 맸던 이 방안에 그의 유령이 나를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심산으로 오롯이 회복에 전념했던 것 같다. 끈질기게 그것을 신뢰했다. 그의 유령이 나의 집에 얹혀 지내고 있다는 기분으로. 내가 유령의 집에 얹혀 지내고 있다는 기분으로. 내게 찾아온 세 번째 목소리. 유령들의 목소리가 회복하는 나의 기운에 기생하여 비로소 자족할 수 있도록. 목소리를 듣는 일. 나는 그것이 떠난 것들과 남겨진 것들이 여전히 공생하고 잔존할 수 있는 가능성이라 믿는다.
나는 유령살이 중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