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에서 담배 한 갑과 맥주 한 캔을 사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야. 독기를 품고 끊은지 1년이나 되었는데. 원래라면 아이스크림이나 과자 같은 간식을 샀어야 했지. 아니면 매운 음식 같은 게 좋았을지도. 스트레스 해소에는 맵고, 짜고, 단 거. 그런 게 제 격이거든. 그런데 오늘만큼은 그걸로는 안되겠다 싶더라. 기분이 그래. 조금 독한 게 필요해. 마침 벤치에 앉을 자리가 있네. 어둑해서 잘 안 보이겠지? 잠깐 앉아서 한대 피우고 들어가자. 무슨 일 있냐고? 당연하게 있지. 얘기해 보라고? 너무 당연하게 겪는 일이라 이야깃거리도 없는데. 글쎄...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할까. 있잖아,
꼰대. 또라이. 진상. 빌런. 그들을 일컫는 멸칭들. 불의 발자국을 찍으며, 태연하게, 내가 가꾼 풀밭을 침략하는 존재들. 나는 오늘도 그들에게 짓밟히고 왔어. 불의 발자국 사이의 나약한 토끼풀처럼 고개를 숙이고 왔어. 그들의 발자국을 피해서 살아남은 토끼풀 한 송이를 들고서 이건 단지 내 나약함일 뿐이야. 생각하며 웃고 또 웃었어. 가벼운 무릎을 팔면서 굴복해야했어. 오랫동안 그렇게 버티는 것이 살아남는 방법이라 배웠어. 왜 그 누구도 내게 싸우는 방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던 걸까? 다만 버티라고. 버텨야 한다고 설득했던 걸까? 나는 그들의 몸을 뚫고 돋아난 뿔이나 가시로는 자랄 수 없었어.
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 경험도 없는 네가 뭘 알아? 나 바쁘니까 나중에 해. 장단 바꿔서. 그건 네가 알아서 해야지. 아직 이것도 몰라? 안 바쁘지. 이거 먼저 해. 삐걱삐걱. 나는 어느 장단에 맞춰 춤을 춰야 하는 걸까? 당신들께 물을게. 구르고, 깨지고, 빗발치는 것이 젊음이었다고 말하던 당신들은 왜 그런 젊음을 비웃고 있는 것일까?
처음에는 이해하려고 노력했어. 한 걸음 물러서서 이해해 보려고. 한 걸음 더 물러서서 무시해 보려고. 또 한 걸음 물러서서 피해 보려고. 그렇게 몰리고 몰려서 저 불의 발걸음이 내 속을 다 태우고 짓밟을 때까지 나는 계속 뒷걸음질을 쳤어. 참아야 했어. 아주 당연하게 무뎌지게 됐어.
하지만 나는 이제 무뎌진 마음을 깨고 저항을 원해. 멸칭들과의 안녕을 원해. 당신들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라 생각해. 거울이 더러우면 깨버리면 그만이지. 그리고 묻는거야. 아직도 더럽냐고. 그 거울을 깨버릴 무기는 당신들의 몸에서 돋아난 뿔이나 가시 같은 날카로움이 아니야. 그건 이를테면 허수아비의 뇌. 양철 나무꾼의 심장. 겁쟁이 사자의 포효. 도로시의 마법구두.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이 가진 고유한 힘. 아마도 지혜, 사랑, 용기, 상냥함. 폭력에 저항하는 각자의 무기. 내게도 그런 무기가 있어. 여기, 떨리는 내 손. 그 안에 쥐어진. 고개를 꺾었지만 살아남은 토끼풀 한 송이. 강함의 반대는 나약함인가? 아니. 강함의 반대는 나약함이 아닌 나긋함이야. 그게 바로 나의 무기야.
나는 결국 당신들을 이기지는 못하겠지. 바라지 않아. 하지만 비로소 안녕을 전해. 당신들께 돋아난 뿔과 가시에. 그것에 찔려 피 흘리는 마음에. 멀리멀리 씨앗을 퍼트릴 나의 무기, 나의 행운, 나의 나긋함을 가만히 올려 놓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