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몽타주와 콜라주
3년 전부터 목이 없는 꿈을 꾼다. 예민한 성격 탓에 잠귀가 밝고 깊게 잠들지 못하는 편이긴 하였으나 이렇게 많은 꿈을 꾸는 편은 아니었다. 평생 꾸지 못하던 꿈을 3년 내 몰아서 꾸는 것만 같다. 잠에 들면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듯이 자꾸만 꿈이 찾아온다. 대부분의 꿈들은 일상과 함께 흩어진다. 하루를 보내고 그날 밤이 되면 먼저 찾아온 꿈들은 나중에 찾아온 꿈에 밀려 사라진다. 잔상과 소멸. 반복. 밀려 사라지는 꿈에 어떤 의미가 있을 것만 같아 그 의미를 도출해 보려고 애를 쓰지만 늘 꿈들에는 목이 없다. 꿈의 몸짓. 체취. 목소리. 타고 올라가다 보면 마침내 있어야 할 표정이 그 자리에 없다. 꿈은 원래 그런 것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따금 조용히 찾아와서 못내 사라지는 꿈들의 미련이 느껴지는 것만 같다. 정말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 것이었을까. 나는 몇 가지 꿈들이 다음 꿈에 밀려 사라지기 전에 기록해 두었다. 몽타주와 콜라주. 나는 목 없는 꿈들을 이어 붙여 얼굴과 표정을 만들어 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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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속에 나는 자주 찾는 강변 공원에 있었다. 운동장 서너 개는 거뜬히 들어갈 정도의 너른 초원이 펼쳐져 있고, 주말이면 동네의 주민들과 그들의 반려들이 뛰어노는 장소였다. 초원에는 사람은 온데간데없고 그들의 반려들만 옹기종기 모여 서로의 냄새를 맡고 있었다. 나는 조금 걷다가 초원의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남겨져 있는 피아노 하나를 발견했다. 피아노로 가까이 다가가자 갑작스레 손 하나가 나타나 건반을 하나씩 하나씩 두드리기 시작했다. 하얗고 앙상하고 파리한 손이었다. 손은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건너고 있었다. 손이 한 음계 한 음계를 건너는 동안 주인 없는 반려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서로에게 기대어 피아노와 피아노를 건너는 손 주위로 둘러앉았다. 소리와 체온이 함께 엉켰다. 감각이 뒤바뀌었다. 소리의 둘레. 체온의 파동. 물결의 희미한 가장자리가 내게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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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조 안에서 깜빡 잠이 들었다. 새해의 전야였다. 잠들기 전 걸었던 해변의 파도를 밟았던 촉감과 숨차게 올랐던 호텔 계단의 촉감이 꿈속에서 뒤 섞였다. 나는 파도의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계단을 한 칸 한 칸 오를 때마다 푸른 종소리가 머리 위에서 빙빙 돌았다. 계단의 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계속해서 올랐다. 숨이 차지 않았다. 끝없는 계단의 끝에 누군가가 있을 것만 같았다. 누군가 내 걸음에 맞춰 푸른 종을 울리고 있었다. 그가 누구인지 꼭 확인하고 싶었다. 파도의 계단은 펜로즈의 모형과 같았다. 나는 착시와 무한을 오르고 있었다. 펜로즈의 파도 계단. 불가능. 꿈에서 깼을 때 욕조의 물은 식어있었고 수도꼭지에선 물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다. 시계를 확인하니 자정을 넘은 시간이었다. 새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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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어딘가로 다녀오겠다고 말했던 사람이 꿈에 나왔다. 꿈에 나온 그 사람과 나는 치앙마이에 있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툭툭을 타고 올드타운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대화를 나누기엔 끔찍하게 덥고 습한 날씨였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했다. 그 사람은 벌레들의 끈질김을 이야기했고 나는 원숭이의 교활함을 이야기했다. 그 사람은 기념품 가게에서 산 머리끈을 이야기했고 나는 작은 불상이 달려 있는 팔찌를 이야기했다. 우리는 어떤 사원에 도착해서 기도를 올리고 숙소로 향했다. 숙소로 가는 길에서도 맥락 없는 대화는 계속 이어졌고 곧 비가 내렸다. 숙소에 도착하마자 그 사람은 한쪽 무릎을 올린 양반다리 자세로 앉아 머리를 말렸고 나는 향을 피웠다. 머리를 말리던 그 사람은 문득 목 없는 불상과 치앙마이의 우림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죽음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것들이 가진 빽빽함과 습도와 불투명함이 우리를 숨겨주리라고 그 사람은 믿었다. 나는 그 사람에게 말했다. 너무 많은 과거를 비축하지도 말고, 너무 많은 미래를 빌려오지도 말고, 오늘만을 신뢰하라고. 단지 오늘을 신뢰하는 힘으로. 그 선명함으로 기도하고 살아가야 한다고. 그 사람은 나를 향해 웃었고 무언가를 뻐끔뻐끔 말하려던 찰나에 더욱더 큰 비가 내렸다. 쏴-. 수신 불가. 꿈은 그곳에서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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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리성지를 순례하고 돌아온 숙소에서 꿈을 꾸었다. 객지의 꿈이었다. 꿈이라기보단 가위에 가까운 체험이었다. 꿈속의 장소는 기도를 드렸던 신리성지의 언덕이었다. 기도를 드리기 위해 모았던 손의 오른쪽으로 해가 넘어가고 있었고 노을이 지고 있었다. 무릎을 꿇은 내 허리춤으로 누군가 슬몃 손을 집어넣어 조심스레 끌어안았다. 불쾌하지 않았다. 누구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오로지 몸짓으로 그 손에 대꾸해야 했다. 나는 기도하기 위해 모았던 손을 풀고 뒤를 돌아 품에 안겼다. 가슴에 얼굴을 묻는 것으로 말을 대신했다. 얼굴이 가슴살에 눌렸지만 숨은 막히지 않았다. 부드러웠고 편안했다. 이대로 눌려 죽어도 좋으니 끝나지 않았으면. 그렇게 바랐다.
그래서 너는 누구니. 누구였니. 풍경이었니. 죽음이었니. 미수에 그친 사랑이었니.
그것도 아니라면, 너는.
꿈을 깨고 메모를 남겨 물었다.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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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신 지 20년이 가까워오는 할머니께서 꿈에 찾아오신다. 할머니께서는 작은 과도를 들고 배를 깎고 계셨다. 나보다 먼저 그분 곁으로 떠난 동생과 사촌이 할머니의 앞에 앉아서 배 깎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어렸을 적 삼촌과 이모들처럼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그들을 혼내야 할 것만 같았다.
야. 너희들 할머니 성가시게.
동생들은 멀뚱멀뚱 나를 쳐다보기만 했고, 할머니는 화가 난 나를 향해 너그럽게 웃으시며 말하셨다.
괜찮다, 아가. 너도 어서 앉아 배 먹어라.
꿈을 깼다. 꿈속에서 동생들은 여전히 내가 기억하는 나이였다. 차례가 바뀌었다. 여전히 배를 깎고 계신 할머니 앞에 있어야 할 이들은 너희가 아니었다. 돌아가신 할머니께 짐을 지운 것 같았다. 모두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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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잠을 잤다. 잠에 들었던 그 자세로 꿈이 시작됐다. 서재에서 인기척이 났다. 그럴 리가 없는데. 나는 살금살금 서재의 문 앞에 서서 숨을 가다듬었다. 문을 열자 내가 앉아 있어야 할 자리에 당신이 앉아 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두려움보다 반가움이 앞섰다. 내 자리에 앉아 있는 당신에게 물었다.
어디 갔다 왔어?
당신은 무심히, 물끄러미, 당연하다는 듯이 대꾸했다.
계속 여기 있었는데?
그 말을 들은 나는 선 채로 울다가, 떨다가, 팝콘처럼 불어나는 말들을 주워 담다가, 꿈을 깼다. 부리나케 일어나 서재의 문을 열었다. 책상 위의 책은 뒤집혀 있고 그 위로 저녁을 준비하는 빛이 희미하게 번지고 있었다. 모든 것은 꿈을 꾸기 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몽롱했다. 계속 여기 있었다는 말이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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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주무른다. 언어의 손을 거친 꿈이, 모호와 막연의 완력과 자극을 견디고 가장 아름다운 질료로서의 소임을 다한 꿈들이 망각 속으로 스러진다. 다시 몽타주와 콜라주.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꿈을 표면과 잠재로 즉 내용과 의미로 분리했다. 표면 작업이 끝났다. 질료를 힘껏 주무른 손이 축축하다. 마침내 목 위의 윤곽이 생긴다. 얼굴과 표정. 완성을 더듬는다. 잠재의 시간이다.
이제, 바라볼 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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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였니?
응, 나였어.
이걸 말해주고 싶었던 거야?
응, 이제 내가 보이니? 이해했니?
조금은. 아주 조금은. 또 찾아올 거야?
필요할 때가 있다면.
자주 필요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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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나와 나 사이의 프리즘. 메타포의 스펙트럼. 내가 조형한 꿈의 얼굴은 어떤 표정을 지었나. 윤곽을 더듬던 손이 입술에 닿는다. 입술의 떨림이 손끝으로 전해진다. 곧 당신에게도 말을 시작하려나 보다. 첫 숨. 모든 말들은 울음을 뚫고 첫 숨으로 내질러졌으니. 그리하여 너와 나는 그 숨에 겨우 안도하고 미소를 짓는다. 그 얼굴과 표정이 자주 필요할 것이다.
끝내 그 얼굴과 표정의 이름을 썼다가 지웠다. 말이 감내할 수 없는 무언가를 그 얼굴과 표정이 감내해 줄 것이다. 다행이다. 내가 지울 수 있는 사람이어서. 그저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어서. 닳아 없어질 때까지 주무르고, 문지르고, 더듬는 일을 반복할 수 있는 사람이어서. 그 산통을 조금은 감지할 수 있는 사람이어서. 애써 자르고 이어붙였던 조형의 시간이 아깝지 않다.
비로소 은유가 시작되었다. |